빌 브라이슨, 권상미 옮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21세기북스.   (유럽여행, 2008.10.01. ~ 2008.10.07.)

그러면서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킬킬대고 웃었다.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낯선 나라의 텅 빈 음식점에서 1인분에 25달러나 하는 피자를 기다리며 혼자 앉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中, p. 191.


저번에 쓴 <오페라의 유령> 리뷰를 쓰다보니 생각난 책이다. 아마도 이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의 유럽여행은 극도로 미화된 상태로 남아있었을텐데.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진실을 알았듯이, 나도 이 책을 읽고 내 여행의 실체를 파악해버린 것만 같다.


유럽 - 배낭여행의 시작

유럽은 배낭여행 초심자가 가보는 기본 코스가 되어버렸다. 동화책에서만 읽던 성을 볼 수도 있을뿐더러, 아름다운 알프스와 지중해의 태양, 각지에서 유럽을 향해 여행온 수많은 여행자와 더럽게 비싼 물가까지 한 번에 체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열흘이든 20일이든 50이든, 뭐 대부분은 한 달을 가는 것 같지만 여튼 그런 짧은 시간 안에 수없이 많은 정보를 눈에 담아가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유럽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어디에 기차는 공짜라서 좋았고, 어디에 산은 트래킹했더니 멋있었으며, 사람이 많은 곳은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둥. 그렇다. 대부분은 유럽에, 그리고 유럽여행에 환상을 남긴 채로 오고야 마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녀온 유럽은 피요르드 해안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만큼 아름다웠고, 제네바에서 먹은 달팽이 요리처럼 비싼 값을 낼만 했으며, 베네치아의 태양빛이 운하에 반사되는 강렬함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바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말이다.


환상을 깨다

그는 말했다.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듯이! 그리고 돈을 받고 표를 내주었다. 스웨덴의 자살률이 왜 그리 높은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中, p. 193.

Damn it!
이 한 마디를 왜 나는 하지 못했나.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빌 브라이슨과 다른 여행을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빌 브라이슨은 여행을 되새기며 항상 툴툴댄다. 어느 곳에서는 말이 안 통한다고, 어느 곳에서는 호텔이 더럽고 비싸다고, 어느 곳에서는 종업원이 불친절하고 음식이 맛없다고. 당연한 것 아닌가! 여행을 다니면서 매순간 매번이 다 좋을 수는 없었을텐데!

빌 브라이슨이 툴툴대는 정도는 이제 삐딱함으로 옮겨간다. 스웨덴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를 알겠다는 중, 이탈리아 사람들은 옷도 벗지 않고 섹스를 하는 법을 고안해낸 것 같다는 둥, 가이드북에 나오는 언어 부록이 "7시, 10시, 10시 반, 정오, 자정, 오늘, 내일 그리고 내일 모레 목욕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실래요?" 따위라는 둥.

빌 브라이슨은 '네오'다. 나의 환상 혹은 환상적인 여행 기억을 없애주는 네오.

물론 이런 환상적인 기억을 완전히 지우랴마는...



그 속의 매력을 찾아서

5년 후에 다시 소피아에 가본다면 피자헛과 로라 애슐리가 즐비하고 거리에는 BMW가 넘쳐나며,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리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추호도 비난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변하기 전에 그곳에 다녀왔다는 게 너무도 다행스럽다.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中, p. 376.

툴툴대기만 하는 책이라면 당연히 책은 팔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 책이 그럼에도 재밌는 이유는 바로 신랄한 풍자와 유머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있는 여행기를 쓰는 작가이다.' 라는 말처럼, 빌 브라이슨의 유머는 이 책을 여행 정보를 소개하는 가이드 북이나 경험을 공유하는 기행문이라기 보다는 여행 재미를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다. 빌 브라이슨의 또 하나의 매력은 삐딱함 속에 숨어있는 따뜻함이다(출판사 분들은 이런 문구를 정말 잘 생각해냈다!). 외국 도시의 낯선 거리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것을 상상하며 매일 저녁 새로운 도시에 가보면서 평생을 살고 싶다던가, 교회 계단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매일같이 이웃들과 아름다운 별빛을 보며 담소를 나누고 싶다는 말은 따스함을 가지지 않고서야 나오지 못할 표현이리라.


진정으로 이 책은 유럽여행을 재미있게 전달해 주는 책이다.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환상이 아닌 상상을 하게 해준달까? 다녀온 사람에게는 맞아, 하는 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이를 느끼도록 번역해주신 옮긴이 역시 대단한 감성과 센스를 가진 분이리라.

아, 빌 브라이슨은 진정한 '네오'다. 단편적이었던 내 기억을 재밌게 만들어 주는.
Posted by no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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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떤 내용인지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환상이 아닌 상상을 하게 한다라.. 멋집니다.

    2010.04.12 23:3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마래바님은 여행 많이 다니신 것 같은데... 읽고 나셔도 별 감흥이 없으실지도 모릅니다 ㅎㅎ

      2010.04.13 11:08 신고 [ ADDR : EDIT/ DEL ]

책 이야기/소설2010.02.16 08:15

가스통 르루, 최인자 옮김
<오페라의 유령>문학동네.   (프랑스소설, 2006.06.26.)

"크리스틴,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 하오!"
그러자 슬픔에 가득 찬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흘리는 듯,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나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노래를 불렀는데!"
순간 라울의 심장은 영원히 멈추는 듯했다.
-- 『오페라의 유령』中, p. 54.


2006년이다. 첫 유럽여행인지라 가슴이 설레었던 것도 잠시, 어지간하면 그런 고민을 안 하겠지만 가격이 제일 싼 비행기 표를 구한다고 구한 항공편이 베트남 항공이었기 때문에, 유럽까지 가는 그 긴 시간동안 난 뭘해야 할까- 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유럽여행 가는데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골랐던 책이 바로 이 <오페라의 유령> 이었다.

간만에 옛 생각을 하다보니 책장에 이 책이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다시 읽어봐도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이야기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공포 소설? 추리 소설? 연애 소설?

소설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듯, 대체로 하나의 분위기만을 가지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하나의 '장르' 가 결정이 되면 그 소설은 '장르' 안에서 가지는 분위기를 일관적으로 띈다는 말이다. 소설을 분류할 때 연애소설, 추리소설 같은 장르로 나누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그런 점에서 모호하다. 이 모호함은 결국 여러 장르의 맛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나 역시 처음에는 미스테리 소설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런 생각만 했을 뿐이었지만, 책을 덮고 난 후부터 누가 그런 소리를 했나 찾아서 때려주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크리스틴 다에와 라울 샤니, 또다른 로미오와 줄리엣.

<오페라의 유령> 에서 주인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 사람이다. 그 중 둘이 바로 아련한 사랑을 나누는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오페라 가수 크리스틴 다에와 그녀의 연인 라울 샤니 자작.

이 둘울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다른 연애소설과 같은 플롯을 지니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서로를 알아왔으나 현실에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사랑임을 알고 슬퍼하는 모습, 그리고 강력한 반대에 빠진 그들의 사랑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나는 주저않고 크리스틴 다에와 라울 샤니를 또다른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애소설은 정말로 다양하다. 그렇지만 비극적 스토리, 아름다운 수사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문호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두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교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가련한 연애의 감정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


아름다운 두 연인의 이야기가 전부였다면 이 책은 아름답지만, 아주 특출난 소설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페라의 유령의 존재는 더욱 더 특별하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소설은 여러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인 모습을 보인다. 연애소설에다 공포와 미스테리가 적절히 섞인 듯한 이 소설은 결국 오페라의 유령에 의해 완성된다.

오페라의 유령은 연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오페라하우스에서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일들의 주모자로, 그리고 광기어린 사랑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미치광이로 등장한다. 그는 연민을 자아내는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라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준다.

흔히들 연애소설의 주인공은 연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오페라의 유령 없이는 그 어떤 이야기도 이어지지 않지 않는가. (하물며 제목이 <오페라의 유령>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광기에서 우리는 공포를 느끼고, 그의 천재적인 재능에서 미스테리함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오페라의 유령의 매력이자, <오페라의 유령>의 매력이다.


아쉬움을 뒤로하며

유럽여행을 마치며 생각이 났다. 나는 파리 오페라하우스-가르니에 궁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는 이미 더 이상 가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가는 비행기에서, 여행하는 도중에 읽어놓고도 꼭 가보기로 한 곳을 잊어버리다니!

그래서일까, 돌아와서도 다섯 번은 더 읽은 것 같다. 그렇지만 매번 읽을 때마다 아직도 위대한 사랑의 감동이 다가오며, 유령의 쓸쓸한 모습에서 연민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아직은 속물이라고 단정짓기에는 감수성이 남은 것 같아 다행인걸까.

인터넷 서점에서 '오페라의 유령' 을 검색해보자. 소설과 뮤지컬이 모두 뛰어나기에, 엄청나게 많은 상품이 올라와 있다. 그 중에 하나라도 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구입하길 추천한다. 빌려서 읽어봐도, 들어도, 봐도 좋겠지만 이런 명작은 두고두고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Posted by no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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